광복(光復)을 만든 분들 (시144:10-15) ...... 2020. 8. 9. 주일낮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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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光復)을 만든 분들 (시144:10-15) ...... 2020. 8. 9. 주일낮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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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光復節)은 한반도가 일본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광복에서 을 의미하는 명사적 표현이 아니라 영예롭게() 되찾음()”이라는 부사적 해석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예롭게 주권을 되찾았다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는데는 많은 분들의 희생과 헌신과 땀과 눈물과 목숨이 있었습니다.

먼저, 광복을 만든 분들은

1.만주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김구, 김좌진. 윤봉길, 안중근.....)

참 많은 희생으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헌신했습니다. 부자들도 재산을 바쳐서 협력을 했습니다.

 

독립군이 되기 위해서는, 3가지 맹세를 해야 했다.

첫째, 추운 만주벌판에서,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둘째, 추운 만주벌판에서, 얼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셋째,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혔을 때, 모진 고문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굶어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고문 받다 죽을 각오)

 

한국의 독립군은, 하나의 단체라기보다는 일제에 저항하거나 교전한 여러 준군사조직의 통칭입니다.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단체들 외에, 사료 상에 남지 않았거나, 제대로 조직이 체계화 되어 있지 않았던 독립군 단체들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독립군 활동의 전성기는, 1910년대, 1920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를 거치면서 절정기를 맞았으나,

1920년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했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했지만 성과가 없자, 민간인과 군인을 구별하지 않고 한국인들을 닥치는대로, ‘수만 명을 학살하는 간도 참변을 단행했습니다.

이로써 서간도, 북간도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의 간도 한인무장부대들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자 독립군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서, 북쪽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 지역인 흑룡강성 흑룡강성 등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1921628자유시 참변이 일어났습니다.

생필품이 부족한 독립군이,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농민지역에서 약탈과 폭동을 벌이다가, 러시아의 붉은 군대(공산군)에 의해서, 수십만의 독립군이, 사살당한 사건으로. 다른 말로 하면 자유시 사변’, ‘흑하사변이라고도 합니다.

자유시 사건으로, 독립군의 주도세력이 괴멸되었고, 1931년경에는, 만주 사변으로 말미암아 그 근거지마저 위협받고, 그리고 오랜 전쟁에 지치기도하면서 독립군의 위력은 차츰 둔화되어갔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모든 독립군 세력은 아주 미약하게 되어 러시아등지로 피신하여 있었습니다.

 

이 무렵 백선엽 장군-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여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복무

해방을 맞아 조만식의 비서로 있다가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자 월남하여 6.25 전쟁 시 공을 세움

 

두 번 째로 광복을 만든 분들은

2.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입니다.(이승만 안창호...)

이 분들은 각국의 이해관계로 치열한 국제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의 존재를 알리며,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계속해서 국제사회 속에 알리는 일들을 했습니다.

그래서 각종 국제회의에서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미국의 정치인들을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으며 국제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각하는 일들을 합니다.

 

가쓰라 다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가쓰라 테프트 조약. 가쓰라-태프트 협정

러일 전쟁 직후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

1905729, )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일본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도쿄 회담

 

당시 국제사회는 한일합방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그리고 강대국은 강대국끼리 서로 합의하에 약소국을 점령하는 것을 서로 묵인하였습니다.

 

당시 만해도 국제사회에서는 한국이라는 존재는, 일본에 예속된 잊혀진 나라가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하나 들어보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 할 때

독일을 동서로 나누어서, 미국과 소련이 진주하였으면 당연히

일본을 나누어서, 미국과 소련이 진주를 해야 함에도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 미국과 소련이 진주...

그만큼 한국을 일본의 예속된 국가로 보게 되고, 그것이 결국 동족이 분리되어 6.25전쟁까지...

 

2차 세계 대전은 1943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연합군 측에 유리하게 전개가 되었습니다.

 

19431127카이로 선언 미국·영국·중화민국 3국은(루스벨트·처칠·장제스), 5일간 회의

각 군사사절단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3대 동맹국은 일본의 침략을 정지시키고,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번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위 동맹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으며, 또 영토를 확장할 의도가 없다.

위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 대만 및 팽호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조선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를 위해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아내는 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작전을 계속할 것이다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장제스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키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

2차 세계 대전이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을 하고, 나치 독일이 패전할 기미를 보이자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나치 독일 패배 후를 의논하기 위하여 크림 반도에 위치한 얄타에 모여서 회담.

1945. 2. 4.- 11일 소련 흑해 연안에 있는 얄타)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스탈린, )윈스턴 처칠.

 

나치 독일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국이 분할 점령한다

독일 땅에서 민주적 투표방식으로 대통령 선거.

연합국은 독일에 최저 생계를 마련해 주는 것 이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

나치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 몰수,

전쟁의 주요 전범들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하였고,

전후 배상금에 대한 문제는, 별도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임하기로 하였다.

폴란드에 대해서는,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에 병합. 폴란드에겐 동독의 일부 지역 주기로.

 

결국 1945429일 나치 독일이 항복하고 히틀러는 430일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 1945726일 미, , 중 독일의 포츠담에서 발표한 선언

)트루먼, )처칠, )장제스가 선언에 서명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소련의 스탈린은 서명하지 않았고, 중화민국의 장제스 국민정부 총통은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전신을 통해 선언 참가를 밝혔습니다.

 

포츠담 회담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전후질서 구축 문제를 논의한 회담입니다.

이 회담의 결과는 포츠담 협정으로 문서화되었습니다.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한 것

그 내용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1-5: 서문.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 인민과 일본 인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

6: 군국주의 배제. 7: 일본 영토의 보장 점령. 8: 카이로 선언의 실행과 일본 영토의 한정.

9: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10: 전쟁 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 존중의 확립.

11: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 유지의 허가.

12: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13: 일본 군대의 무조건 항복.

 

그러나 일본은 이 포츠담 선언을 무시하고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미국이 86일 히로시마에, 8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소련도 88일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와 동시에 참전하여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일본 군부는 항복을 결의하고, 1945810일 포츠담 선언의 수락을 결정하고 미국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통보하자 미국은, 1945814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의사를 받아 수락하여 제2차 세계대전은 종전 되었습니다.

 

그날 정오에 일본의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이 라디오로 중계되었습니다.

815일 일왕의 중대 발표가 있으니 조선인들은 경청하라는 벽보가 나붙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라디오를 가진 조선인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발표 방송은 잡음이 심했고, 어려운 한자가 섞여 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 당시 발표문은 그 당시 쓰던 일본어도 아니고 일본 왕족들만 쓰는 말로 나왔고, 당시 일왕의 발표는 항복이라기보다는, 원자폭탄으로 말미암아 일본 군대의 희생이 크므로, 전쟁을 멈춘다는 내용.

이 내용은 자국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고 전했집니다.

 

816, 다음날이 되자 전날 일본왕의 방송내용이 항복방송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던 정치범과 경제범이 석방되기 시작하면서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한편, 함경북도 청진시에서는 여전히 소련이 일본 제국과의 전투는 계속되었습니다.

한편, 해외에서 독립운동 활동한 한국광복군은, 1945818일 낮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면서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무장한 채, 여의도에 착륙한 이들은 미군이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다시 오라는 일본군의 협박에 굴복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후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194511월이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광복을 만든 분들은

3.조선 땅에 선교하러온 선교사들의 기도와 희생과 헌신이었습니다.

 

그동안 한일합방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호적으로 받아드리던, 미국 정치인들의 시각이 변하게 된 것은,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보고하는 선교보고서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돈에다가도 고백하는 그 민족이 당시 목회자와 선교사들에 대한 입장은 충분히 그들이 경청하던 시대였습니다.

 

더 더구나 멀리 타국에 가서 몸소 체험하면서 보고하는 그들의 선교 보고는, 국내외 정치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카이로 회담과 각종 국제회의에서 이 선교사들의 입장을 반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외교권을 완전히 침탈당한 대한제국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을 때 이 선교사들의 노력과 헌신은 8.15 해방을 맞게 된 대한민국에 잊지 못할 밀알들이고 등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기까지 잊지 말아야 할 그리고 감사해야 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독립군들이나 독립군을 도와 물질적으로 재정적으로 도움 조선의 모든 백성들, 그리고 국내외 적으로 독립을 위해서 헌신한 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국에 와서 대한제국의 현실을 바로 알린 선교사들의 기도와 헌신과 희생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왕에게 구원으르 베푸시는 분은 주 하나님이십니다.

12자녀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13-14 모든 나라의 먹을 것과 각종 산업과 국방문제를 책임져 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15의 결론이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 만세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의 고백이 되고 여러분 신앙의 간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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