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림절의 기다림(벧후3:8-13) 2020. 12. 6. 주일대예배

홈 > 예배 Worship > 주일낮예배
주일낮예배

강림절의 기다림(벧후3:8-13) 2020. 12. 6. 주일대예배

최고관리자 0 13321

The Advent-‘강림절’ ‘대강절’ ‘대림절’... 감리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강림절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크게 두 가지기다림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신약에서는,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기다리느냐가 우리의 신앙을 좌우합니다.

믿음이 식어지지 않으면서 기도하며 잘 기다리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3:25-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기도하고 기다리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선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6:13 아브라함도 내가 너를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하고 번성케 하였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저가 이같이 오래참아” “오래참아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기 그렇게 쉽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노아의 기다림은 100년이 넘게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산 위에다가 방주를 지으면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노아시대에는, 노아 외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실 정도로 아주 타락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산위에 방주를 짓는 노아를 얼마나 비웃고 핍박하고 바보라고, ‘돌았다고’ ‘미쳤다고 했을까요?

그런데 노아는 그럴 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잘 참았습니다.

아무리 조롱하고 핍박을 해도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더 크고 더 귀했기 때문에 그 말씀을 붙잡았기에 노아는 잘 기다리고 홍수가 났을 때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코로나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잘 견디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75세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자녀를 주신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100세에 주셨으니 25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 약속을 의심하고 사라의 몸좀 하갈과 동침해서 이스마엘을 낳아서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적대관계로 싸우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심한 죄의 열매가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거나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다윗도 양을 치다 말고 사무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다윗이 원했던 것도 아닌데도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다윗이 왕이 되기까지는 15년 이상의 세월을 얼마나 고생을 하고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겨야 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다윗을 훈련시키십니다, 골리앗을 이기고, 시기 질투하는 사울 왕을 피해 다니며 고생을 합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꿈을 꾼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꿈을 꾸게 하시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요셉의 고난과 고생한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실 것입니다.

신앙의 승리자들은, 이 기다림의 고난 속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은 것입니다.

 

이 코로나의 고난속에서 여러분 신앙이 약해지거나 식어져서는 안됩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이 긴긴 기다림을 잘 견뎌야 합니다. 굳게 견뎌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러분 베드로가 이 말씀을 쓸 때의 상황은 로마 박해의 시대입니다.

로마 박해시대에는 예수님 믿다가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너무 너무 불안한 세상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기다리다가 마침내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우리는 기다림 속에서 꼭 기억하실 것은, 하나님께서 이 고난의 시간에도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응원하고 계십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주님은 보좌 우편에 서셨다고 하셨습니다.

순교하는 스데반을 중보하시며 보좌에 앉아계시지 못하고 서계셨다고 했잖아요?

스데반이 승리하기를 응원하신 것입니다.

본문 9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기다림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주님을 기다린다, 주님께 소망을 둔다입니다.

그래서 기다림은, 지루함이 아니라 희망’ ‘기쁨입니다. 여호와를 기다림이, ‘새 힘과 기쁨을 얻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이 온다고 하면, 그 기다리는 날 얼마나 기쁘고, 힘이 나세요, 누웠다가도 벌떡 일어나잖아요?

 

제가 언제 저기서 목회를 하는데 임종을 앞둔 어르신이 정말 얼마 안가면 소천을 하시겠어요.

그런데 장남이 미국에서 와야 하는데 잘못하면 오기 전에 소천하시겠어요.

숨이 가빠지고 점점 가실 시간이 가까오는데... 권사님 아들이 읍에 왔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권사님 아들이 저기 읍에 왔데요. 힘 내세요.”하니까 제 손을 꽉잡아요...

그리고 숨이 정상적으로 돌아와요. 아들이 온다는 말에 힘이 나는 거예요.

 

미국에서 아들이 왔어요. 아들이 와서 아버지하고 부르니까,니 하루 종일 눈 뜰힘도 없어서 눈을 종일 감고 계시던 분이 눈을 번쩍 뜨시고 아들을 보더니 눈물이 주욱 흘리시고 제 손과 아들 손을 잡고 소천을 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행복이고 기쁨이고 소망이고 힘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고 앙모하면 주님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8보세요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 같기도 하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렇습니다.

아주 너무 너무 반갑고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앉아 대화를 하면 그 시간이 얼마나 짧게 느껴져요?

그러나 아주 너무 너무 싫은, 보기도 싫은, 사람과 같이 앉아 있는 시간은 얼마나 지루해요?

너무 너무 반갑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30분은 아마 금방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너무 보기도 싫은 사람과의 30분은 아마 몇시간 같이 지나 갈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그 시간이 지루할까요? 몇 시간도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을 기다린 다면 아마 단 몇 분도 못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주님을 기다리는 그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아깝지 않고 헛수고가 아닙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행복이고 설레임입니다.

 

기다림에 대한 좋은 예가 누가복음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결혼을 하고 7년 만에 혼자되어서 주님을 기다리는데 2:37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결혼을 20대에 했다고 해도, 서른 살부터 여든 네 살까지 기다렸으니 최소 50년은 더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니까 50년도 길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잖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요?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경건이라는 말은 내적인 마음의 상태’. 원어 유세베이아’ -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긴다, 봉사한다라는 뜻..

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경건?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게 사는 것입니다. 섬기면서 봉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전하는 이 말씀이 전해지는 상황이 로마박해시대입니다.

이 목숨을 내놓은 박해 속에 성도들이 어떻게 그 고난을 이겼을까요?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주셨기에 용기가 나고 초인적인 힘이 난 것입니다.

본문 13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어떤 시련과 핍박과 힘든 일들이 있을 때, 그것을 참고 기도하면 주님이 힘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어떻게 순교를 하였을까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스데반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비겁하게 살려달라고 했나요? 아니죠?

스데반은 순교하면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봤습니다.

언제 하늘이 열리는 것을 봤지요? 돌에 맞아 죽을려고 하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고난 속에서 봤습니다. 돌에 맞으면서 봤습니다. 그러니까 초인적인 힘이 나서 넉넉히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고난 속에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로마에 가보면 카타콤”-. 좁은 미로에 지하 무덤이 있습니다. 지하수가 나오는 지하 8층 깊이의 공간입니다.

그곳은 예수님을 믿다가 핍박을 피해서 숨어서 예배드리고 생활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콜로세움이 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다가 잡히면 콜로세움이라는 곳으로 잡혀갑니다. 콜로세움은 먼저 잡혀온 성도들이 맹수들에게 뜯겨서 순교하는 것을 보고 자기들도 그렇게 죽는 것을 기다리는 장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순교 당하는 고통을 목격해야 했던 크리스천들에게 그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의 신앙의 삶이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나지 않은 것이 기적입니다. 왜인지 아세요?

그렇게 맹수들에게 찢겨서 죽어가는 크리스천들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야 할텐데요..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욱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교를 하면서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빛나고 보석같은 천국의 문이 열리니까 맹수에게 찢겨서 죽는 그들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 숫자가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로마의 황제는 크리스천들의 처형을 금하게 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너희의 믿음이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시대의 순교하는 크리스찬들은요 ,그들이 죽음을 앞두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 것을 분명히 본 것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준비된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 축복임을 알 때, 초조하지만 지루함이 아닌 희망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강림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주님이 베들레헴 마굿간 말구유에 오셔서 이스라엘에 빛을 비춰주신 것처럼 여러분들이 주님의 강림하심이 실제가 되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이번 강림절에 주님의 은혜가 넘치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늘이 열리는 놀라운 환상이 여러분과 함께하시는 절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0 Comments